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문단 편집) == 역사 == 1596년 브레스트 연합으로 분리된 교회이다. 당시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정교회]] 신자였으나 영토 대부분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영토였기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의 정교회 인사권을 거의 장악하고, 가장 높은 액수의 상납금을 내는 사람에게 고위 성직을 수여하는 상황이 되면서 정교회 성직자들이 가톨릭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 르부프[* [[르비우]]의 [[폴란드어]] 발음.]의 [[정교회]] [[루테니아]]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르비우 형제단이라는 단체가 [[우크라이나어]]로 된 정교회 인쇄물을 발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자 르부프의 [[폴란드인]]들은 이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지그문트 3세]]는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을 서로 싸우게 만들 목적으로, 르비우 형제단에게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르비우 형제단 전원을 르부프에서 추방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새로 [[동방 가톨릭 교회]] 하나를 만들어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의 의도대로 그리스 가톨릭교회가 성립된 이후 루테니아인들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전역에서 서로 대판 싸움을 벌였다. 그리스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사람들은 배신자라고 비난을 듣는 와중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정부의 힘을 빌어서 정교회를 믿는 동포들과 싸움을 벌이게 되는 등 처음 시작은 대략 좋지 않았다. 폴란드 정부는 처음에는 정책적으로 그리스 가톨릭 교회를 적극 밀어주다가 나중에 반발이 너무 심해지고, 결정적으로 [[보흐단 흐멜니츠키]] 반란으로 나라가 통째로 뒤숭숭해진 터라 결국 그리스 가톨릭 강요 정책을 완화하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와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가 루테니아인들에게 기여하게 되는 바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교육 시설들이 종교 기관에 종속되어 있었던 당시, [[정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는 중세 시대에서 더 진보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던 데 비해, [[가톨릭]] 계열 학교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르네상스]] 문화 및 [[프랑스 왕국|프랑스]]의 최신 학문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 원래의 나쁜 의도와는 다르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우크라이나에 [[서유럽]]의 학문이 좀 더 원활하게 유입되는 통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예수회]] 선교사들이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사람들에게 [[우크라이나어]], [[벨라루스어]] [[성경]]을 보급하고 문해율을 신장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현재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가 세력을 떨치는 곳은 당시 [[합스부르크 제국]]이 지배했던 [[갈리치아]](우크라이나의 [[르비우]] 주변 지역) 지역이다. 브레스트 연합으로 분리된 나머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은 나중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이 지역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하고 [[러시아 제국]]이 들어옴으로써 또다시 정교회 영향권에 놓였다. 당연히 분리를 결정한 이 지역 교회들은 다시 돌아온 정교회 신자들의 박해를 받았고(...), 할리치를 뺀 나머지 지역에서는 반강제로 다시 정교회로 돌아가야 한 경우가 많았다. 친척뻘이던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폴란드 분할 이후 교세를 거의 상실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에서는 가톨릭임에도 여느 동방 교회와 같이 기혼자도 사제로 서품받을 수 있어서,[* 이 부분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사제직이 그 본질 자체로 요구하는 것은 아니(사제생활교령 16)"라고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소련 통치 직전까지 일종의 세습적 성직계층을 이루는 등 족내혼적 경향이 강했다. 할리치 지역이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이은 [[폴란드 제2공화국]]에 의해 통치되면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교회는 폴란드 당국으로부터 차별을 받았고, 이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이 할리치를 차지하면서 큰 탄압을 받았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러시아 정교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풀어줬지만, [[개신교]]나 [[동방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는 그런 거 없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과 역사와 배경이 비슷하되 규모는 더 작았던 루테니아 가톨릭교회[* [[카르파티아 산맥]] 그러니까 오늘날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주]] 및 [[루마니아]] 국경 지대, 이 외에도 [[슬로바키아]]나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에 등 지역에 살던 고립된 [[루신인]] 공동체들이 주로 믿던 동방 가톨릭 교회이다.]는 소련의 탄압 때문에 본거지의 세력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고, [[미국]]의 교세가 더 클 지경이 되었다. 모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의 재산들이 [[러시아 정교회]]로 몰수되었고, 다른 나라로 이민가거나 아니면 비밀리에 지하에서 신앙을 지켜야 했다. 그러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말기인 1989년 12월에서야 그 존재가 승인되면서 다시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소련 해체]] 이후에도 특히 러시아 정교회는 우크라이나 가톨릭교회의 존재를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가톨릭교회가 법적 지위를 회복한 후에는 "정교회의 고유 영토를 잠식하려 한다."면서 배척했다. 러시아 정교회 외무담당 힐라리온 대주교도 "우리는 여전히 동방 가톨릭교회를 관계 정상화의 최대 장애물로 보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